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재통일 (문단 편집) === [[소련]] === [[독소전쟁]]으로 2,000~2,700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소련인 만큼 소련 내부에서는 독일의 통일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. 그렇지만 원체 [[미하일 고르바초프]]가 독일의 통일을 강력히 지지하는 편이었던지라 '독일이 [[북대서양 조약 기구|나토]]에서 탈퇴하고 [[중립국]] 지위를 유지한다면 통일을 인정하겠다'라는 입장을 보였다.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소련 내부사정상 적극적 개입을 할 능력도 없었고 결국 서독과 동독이 통일 시 동독 지역에 나토병력 주둔 금지. 동서독 합쳐 90만이 넘는 육해공군 병력을 37만으로 제한, 핵무기 보유 및 배치 금지 조건부로 통일에 합의했다. 이 과정에서 동독 주둔 소련군의 재배치 비용은 물론 인건비까지 독일에서 부담했는데 훗날 [[헬무트 콜]] 독일 수상은 '10조 [[독일 마르크|마르크]][* 5조 1129억 [[유로]]이며, 한화로는 약 '''6,900조 원.''' [[대한민국]]의 1년 국가예산이 2020년 기준 500조를 겨우 넘는다. 이 정도 경제능력은 사실상 [[미국]] 외에는 불가능하다.]를 지불해서라도 [[소련]]을 구워삶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'라고 회상하기도 했다.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하던 상황에서 [[소련]]까지 태클을 걸었다면 독일 통일은 언젠가 이루어지기는 했더라도 그리 급속히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[[미하일 고르바초프]]가 쿨하게 독일 통일을 승인하면서 통일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. 다만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군은 즉각 이뤄지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[[소련 붕괴]] 등으로 정세가 급변하면서 사정이 복잡하게 굴러갔기 때문이다. 이 때문에 소련군이 [[러시아군]]으로 바뀐 후에도 러시아군의 주둔 자체는 이뤄지다가 [[1994년]]에 완전히 철군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